||0||0인천상륙작전 제59주년이 되는 15일 각종 기념행사가 인천시와 해병대사령부 공동으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상륙작전 당시 주공격로였던 월미도 앞 해상에서의 헌화를 시작으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헌화와 기념식순으로 진행됐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미국 70명, 터키 36명 등 해외 참전용사 110여 명과 국내 참전용사 130여 명이 참석해 당시를 회상하고 먼저 간 전우들의 넋을 기렸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인천과 대한민국의 발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참전용사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승전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홍희 해병대사령관도 기념사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국민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주었고 세계 인류에게는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각인시킨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 9월15일 정식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261척의 함정과 75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 김동섭 논설위원 dskim@chosun.com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쿄의 미군 극동군사령부 회의실.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과 셔먼 해군 참모총장이 나서 인천 상륙을 극구 말렸다. 파이프 담배만 연방 피우던 맥아더는 침묵을 깨고 "인천상륙작전 실패는 없다. 반드시 승리한다"고 단언했다. 그의 서릿발 같은 한마디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아버지가 '전쟁회의는 망설이면 패배주의를 낳는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고 했다.

▶6·25의 전세를 한번에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는 북한을 속이는 전략이 한몫했다. LST(상륙정)가 해안에 접근하려면 수심이 9m가 넘는 만조 때여야 하는데 인천 앞바다의 만조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뿐이었다. 미군은 9월 15일 상륙일을 감추기 위해 언론에 '10월 중 반격, 유엔군 준비 진행 중'이라는 워싱턴발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양동(陽動)작전도 들어맞았다. 미 공군은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군산 인근을 맹폭격하고 9월 12일 특수부대 500여명을 군산 해변에 침투시켰다. 비행기로 '곧 유엔군이 군산에 상륙하니 주민은 대피하라'는 전단도 뿌렸다. 그러자 북한은 "군산에서 대대적 미군 상륙작전을 격퇴시켰다"는 라디오 방송까지 내보냈다. 덕분에 맥아더는 9월 15일 미국 함정 261척에 영국·호주 등 18척, 한국 15척,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 국군 해병대와 17연대 등 7만5000여명을 인천에 쉽게 진입하게 했다.

▶지난 6월 프랑스 북부 콜빌쉬르메르 미군 전사자 묘역에서 '노르망디 상륙 6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는 당신들에게 자유를 빚졌다"며 참전국을 하나하나 거명해 고마움을 표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참석해 "오늘은 자유가 승리한 날"이라고 했다. 60주년 기념식 땐 적국이던 독일 총리까지 참석했었다.

▶그제가 2차대전 이후 최대 상륙작전인 인천상륙작전 59주년이었다.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인천시와 해병대사령부 주최로 기념식이 열렸다. 미국과 터키 참전 용사 110명과 국군 참전 용사 130명이 참석했다. 한 미국 참전 용사가 옛 전우들을 기리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훔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가 팔목에 찬 'POW-MIA'(전쟁 포로-실종자) 밴드가 눈길을 끌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60년이 다 지나도록 용사들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60주년 되는 내년엔 정부가 노르망디작전 못지않은 기념행사를 마련해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