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과 해병대, 516과 해병2여단

by 운영자 posted Mar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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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가 사라져서 다시 올립니다.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있던 혁명파 장교들은 박정희 소장의 일거수일 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위기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지도자를 쳐다보고 그 지도자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한다. 이 석제 중령도 박정희를 관찰하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 총무처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뒤 지금은 천안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너무 긴장되니까 담배 피우던 사람들도 담배를 피우지 않 더군요. 골초인 저도 그랬습니다. 출동부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접한 우리는 박정희 장군의 결단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총장과 나누는 대화를 우리는 옆에서 다 들었습니다. 그 분은 소파에 앉아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그 때 이석제는 박원빈 작전참모 방에 들어갔다가 카빈총과 상자째 의 실탄을 발견했다. 실탄상자를 지프에 실어다 놓았다. 그는 권총을 두 자루나 품고 있는데도 카빈을 들었다. 이석제는 여차하면 한판 크게 벌이고 죽겠다는 각오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박정희가 일어났다.결 심을 굳힌 듯 했다. 항공점퍼를 입고 있었던 박정희는 점퍼 안에 어깨 에 거는 권총집에다가 총신이 긴 리볼버를 차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재 춘 참모장에게 장도영 총장에게 전하라면서 편지를 한 통 건네주었다.


김재춘은 6관구 작전처 송정택 중위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 "지금 즉 시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하고 오라"고 명령했다. 송 중위는 신의주 동 중학교 출신으로서 장도영의 후배였다. 송 중위는 서울 시내로 들어가 지금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서울방첩대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서 울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을 통해서 이 편지를 장도영 총장에게 전달했다. 장 총장은 편지를 읽고는 이 대령에게 건네주어 그 원문은 지금 김재춘 이 보관하고 있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런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 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 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 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 민족을 구하고 명 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 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일철하여 결사감행하게 된 것 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서 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탁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 로서 진두에서 지도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 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 완수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서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불비재배 5월16일 소장 박정희.>.


이 편지를 읽어본 장도영은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 장군이 아직도 6관구에 있는지 알아보고 있으면 전화를 바꿔라'고 지시했다고 한다.박 소장이 전화에 나오자 장도영은 언성을 높이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회고록).


"당신 편지 보았는데 그것은 범행이고 반동이오. 어서 정신차려 빨리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체포하겠소.".


박정희는 "부대들이 거사하기 위해서 출동했으니 이젠 중단할 도리 가 없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장도영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부대들은 내가 일체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명해 놓았는데 무슨 출동 이란 말이오. 체포되지 않으려면 빨리 돌아가시오.".


이런 대화가 사실이라면 장도영 총장은 '반란군'을 출동시키려 하고 있는 '수괴'에게 아직도 '자진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5·16혁명실기'엔 박정희가 이날 밤 두 통의 친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 적고있다. 원래 계획은 쿠데타군이 주요 목표지를 점령한 다음 장총 장에게 윤태일 송찬호 준장을 통해서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었는데 그 전에 탄로가 나는 바람에 없애버리고 다른 편지를 전달한 것이라고한다. 소각해버린 친서의 내용은 이러했다고 한다.


<총장 각하.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 를 명조를 기하여 기어이 단행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다만 처음계획 으로서는 각하를 직접 모시고 이 성스러운 거사를 단행하려 했으나 만 약 이거사가 실패했을 때의 전책임을 소관이 지고 각하에게는 폐가 돌 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만으로 거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러 나 각하께서는 이러하 우리들의 미충을 양해하시고 또한 우리들의 충성 된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이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 선두에 설 것 을 굳게 믿는 까닭에 감히 거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글을 각하께 서 받으실 때는 충용스런 각하들의 부하들은 서울에 진주를 끝마치고 중요한 목표를 점령하여 착착 진행시키는 시간일 것입니다. 속히 나오 셔서 우리를 지도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5월 15일 밤. 박정희 배.>.


'5·16혁명실기'는 이 편지는 이낙선 소령이 기안하고 박정희와 김종 필이 가필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 두 편지의 중대한 차이점은 전달된 편지엔 '각하의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한다'고 적혀 있고 소각해 버렸다는 편지엔 '각하의 묵인을 받은 바 있는 거사 운운'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석제는 '장 총장에게 전달된 편지의 의미는 "혁 명에 실패하면 우리는 죽지만 당신은 빠져나가시오"란 면죄부였다'고 주장했다.


김재춘은 새벽 2시 전 박정희 장군에게 "공수단으로 가셔서 부대를 직접 지휘해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5·16혁명실기'에 는 박정희가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수단행을 강행했다고 적혀 있다. 이석제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공수단과 해병대도 안심이 안 되는군. 내가 직접 가서 출동을 지켜봐야겠어"라고 말하며 6관구를 나 섰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공수단으로 떠나기 전 김재춘에게 "참모장은 계속 여기에 남아서 지휘해주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종필은 나중에 이날 밤 거사를 성공시킨 박정희의 3대 결심을 꼽은 적이 있었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을 알고도 신당동 집을 나와서 진 압군측 헌병들이 기다리는 6관구로 향한 것, 혼란에 빠진 6관구에서 나 와 실병력이있는 공수단과 해병대로 간 것, 그리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의 결단이 그 것이다.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부관이 시간에 맞춰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밤11시였다.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통신참모 문성태 중령 이 기다리고 있다가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단내 미 군 고문단도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최 소령은 전차중 대의 출동문제를 제기했다. 원래 출동계획에는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면 그 굉음으로 한강다리를 넘기 전에 폭로될 위험이 있다고 해서 제외되 어 있었다. 최 소령은 주력부대가 서울시내로 들어가는 시간에 맞추어 전차중대가 출발하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자정을 넘어서 5월16 일로 넘어간 뒤 드디어 오정근 대대장이 전화로 보고해 왔다.


"지금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지휘반은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게 되어 있었다. 김윤근 여단장은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군종 참모 김광덕 대위를 찾아나섰다.


그는 여단내의 교회로 들어가서 군목을 모셔오라고 했다. 자다가 일어난 김광덕 대위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으면서 들어왔다. 김윤근은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거사계획과 취지를 설명해주었 다.


"지금 막 거사부대의 선두가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잘하는 일 이라고 믿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일이라면 우리가 하려는 일을 쳐부수어 주시겠지만, 출동목적을 모르고 나가는 많은 장 병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놀란 표정이 된 김 군목은 곧 침착을 되찾더니 뜨거운 기도를 올려 주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김윤근은 교회를 나왔다. 그는 지프를 타고 전차중대로 향했다. 이미 주력부대의 트럭 종대가 엔진소리를 우 르렁거리면서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중대본부에 도착한 김윤근은 정문 보초에게 "지금 중대장을 보러가니 전화로 깨우라"고 명령했다.중 대장 막사에 들어가니 김현호 대위가 옷을 입고 있었다. 김윤근은 그에 게 또 거사 취지를 설명해주었다.


"여단장님이 나가신다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오전 4시에 출발할 수 있소?".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출발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습 니다." "좋소. 오전 4시에 서울로 출발하시오.".


김윤근의 후미에 붙은 60여대의 트럭종대는 대대병력을 태우고 김 포가도를 달렸다. 달은 없었지만 별빛이 영롱한 밤이었다. 해병대가 염 창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가에 박정희 장군과 일행이 서 있는 모습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들어왔다. 김윤근은 급히 차를 세우고 내렸다. 철모 를 쓴 김 장군은 박정희에게 뛰어오더니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보고했다.


"해병대 이상 없이 출동했습니다." "수고 많았소.".


박정희는 김 장군의 손을 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 장군, 30사단에서 거사계획이 탄로가 났소. 그래서 30사단, 33 사단, 공수단 다 나올 수 없게 되었소. 이제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 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으니 김 장군만 믿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는 수 없지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해 봅시다.".


김윤근은 담담하게 말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이때의 심정을 김윤 근은 이렇게 고백했다.


<다시 지프에 올라 강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 은 앞을 비치고 있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안보이는 기분 이었다. 굵직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 졌다. 처음부터 잘못되면 죽게 된다는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막상 육군부대가 출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엄청난 차질에 부딪히게 되 니 이것저것 모두가 후회되었다.>(회고록 '해병대와 5·16').


김윤근은 한강으로 다가가면서 어제(5월15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출근하려고 삼각지를 지날 무렵이었다. 해군 참모총장 차가 앞질러 가기에 들여다보니 이성호 총장 옆에 함대사령관 이맹기 소장이 동승하고 있었다. 김윤근은 손짓으로 앞차를 세우게 한 뒤 이맹기 소장 을 내리도록 했다.


"내일이 D일인데 알고 있소?" "D일? 그게 무슨 말이오?".


"김동하 장군에게서 무슨 말 듣지 못했소?" "글쎄, 아무 말도 들은 것이 없는데….".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것 같으니 용서하십시오.".


김윤근 준장은 정중히 사과드리고 인사를 한 뒤 김동하 장군의 말 을 곱씹어보았다. 김동하는 '이맹기 장군도 거사에 찬동했고 거사일에 는 해군함정 수 척을 인천항에 배치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던 것이다.한 강으로 접근하면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다가 김동하 장군을 떠올린 김 윤근은 선배를 너무 믿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와 장교들은 염창교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해병대 차량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지축을 울리면서 출동하는 해병대 는 박정희에게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적이었다. 한때 "부대가 나와 야 산속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이라도 하다가 협상이라도 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박정희는 이젠 성공의 확신까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다. 염창교에는 6관구 사령부에 모였던 육군 장교들 10여명이 와서 기 다리고 있다가 박정희와 해병대를 만났다. 박정희는 이들 장교에게 "이 제는 부평33사단으로 가서 출동을 독려하라"고 명령했다. 단호하고 자 신감이 붙은 말투였다.


박정희 차는 해병대를 뒤에서 따라갔다. 해병대 뒤에는 출동이 늦 었던 공수단 트럭이 따라붙었다. 이로써 해병대는 선두부대가 되었다. 이는 김윤근이 피하고자 했던 상황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해병대는 육군으로부터 당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해병대와 공수단은 새벽 3시30분경한강 인도교의 남단인 노량진쪽에 도착했다. 남한강파출 소의 경찰관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오는데 해병대 병사들이 공포를 쐈다.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해병여단의 선두인 제2중대가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을 때 트럭 두 대를 여덟 팔자로 배치한 헌병들의 제지를 받는다. 중대장 이준섭 대 위는 참모총장도 이번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헌병들이 총장의 명령을 받아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 줄 알고 헌병 중대장 김석률 중대장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런데 김 대위는 "우 리는 총장님의 명령에 따라 어떤 부대의 통과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이 보고를 전해들은 오정근 대대장은 김윤근 여단 장에게 뛰어갔다. 오 중령도 참모총장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고 알 고있었으므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따지듯 말했다.


김윤근은 박정희 소장한테 들은 대로 설명해준 뒤 "해병대만 가지 고 혁명을 강행하기로 했으니 헌병이 계속해서 막으면 밀어버리시오" 라고 명령했다. 오정근 중령은 "알았습니다. 밀어버리겠습니다"하고 시원하게 복창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오정근 중령은 원래부터 해병대 단독거사를 꾀했던 이였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주저할 이유가 적었다.
그뒤 앞쪽에서 총성이 들려왔고 곧 조용해지더니 오정근 중령이 무전기로 보고했다.


"헌병을 쫓아버리고 지금 저지선을 통과해서 인도교로 들어갑니다.".


한강인도교 남단에 설치한 트럭 바리케이드를 넘는 총격전에서 헌 병 3명, 이준섭 대위 등 해병 6명이 부상했다. 해병대 후미쪽에 붙어 있던 김윤근 여단장이 탄 지프도 인도교로 들어갔다. 바리케이드로 놓아둔 트럭은 엔진이 꺼져 있어 치우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김 윤근 여단장은 지프에서 내렸다. 중지도쪽에서 또 총성이 들렸다. 오 정근 중령이 달려왔다.


"중지도에 제2 저지선이 있고 헌병이 저항합니다. 혹시 이 다리에 폭파장치를 해두었을지 모르니 병력을 일단 노량진쪽으로 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폭파장치가 그리 쉽게 되겠소. 걱정 말고 밀어붙이시오. 그런데 저 저지선의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에 거슬려요. 저것부터 깨부 숴버려요.".


오정근 중령은 중지도 지점에 설치된 제2 저지선의 헤드라이트를 겨냥해서 일제 사격을 하게 했다. 불빛이 꺼지자 제2 저지선도 돌파 되었다. 김윤근 준장은 한강 인도교의 반을 지나 이제는 용산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서서히 움직이던 해병대 차량종대는 다시 정지했 다. 오정근 중령이 다시 달려왔다.


"큰 일입니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큰 일은 무슨 큰 일이오. 저지선이 있으면 돌파해버려야지." 그러나 김윤근도 앞으로 저지선을 몇 개나 더 돌파해야 할지를 생 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날은 이미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아직 한강다 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으니…. 실패라면 살아서 욕을 보느니 자결해버 려야지'하는 생각을 하니 아내와 세 아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 러다가 트럭을 탄 장병들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아무것도 모르고 출동한 장병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때 박정희도 차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있었다. 그 를 호위하던 장교들 가운데 한웅진 준장과 이석제 중령의 증언을 통 해서 상황을 복원해본다. 박정희 일행은 중지도, 즉 한강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 북쪽으로 걸어갔다. 북단에는 제3의 저지선이 있었다.트 럭 4대를 동원하여 차단벽을 만든 것이다. 트럭들 좌우측에서 헌병들 이 매복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해병들은 상체를 숙이고 뛰어가 저지 선 앞에서 엎드려 응사하고 있었다. 헌병들의 병력이 얼마인지를 알 수가 없었으니 불안감은 더했다. 박정희 소장이 상체를 숙이지도 않 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빈을 든 이석제 중령이 따랐다. 그는 6·25동란 때 중대장으로 전투한 경험이 생각났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 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경험 칙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그런 믿음에 따라 행동하니 부하들이 용감한 중대장이 라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총알을 고개 숙여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이석제와 박정희가 꼿꼿하게 걸어가는데 총알 이 옆으로 쌩쌩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윤근 준장이 박정희에게 뛰어왔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지선이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목표 점령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대로 밀어버리시오.".


박정희의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에 김윤근 준장도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해병대가 작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 를 피워물었다. 이석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각하, 일이 끝내 안되면 각하 바로 옆 말뚝은 제 것입니다.".


박정희는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하나뿐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서 쓰나.".


잠시 후 박정희는 "이 중령"하고 불렀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2안대로 합시다.".


박정희가 생각한 제2안이란 출동한 부대로써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는 정부와 담판한다는 것이었다. 한웅진은 "박 장군은 총격전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난간을 잡고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보더니 일본말로 '주사위는 던져졌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한웅진은 "형님, 그때 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박 정희는 "가족들 얼굴이 강물에 떠오르더군"이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 순간 박정희의 결연한 태도가 흔들리는 장교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는 증언은 많다. 예기치 않은 저항을 받은 혁명군 장교들 모두가 박정희를 주시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는 행동을 보였다. 결정적 순간의 이런 결정적 행동이 그 뒤 18년간 단 한 번도 정면도전을 받지 않은 그의 지도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516과 해병2여단

 

5.16군사쿠데타(예전 5.16혁명)는 당시 김포에 주둔중이던 해병2여단에 의해 거사가 이루어지고 또 성공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해병대의 역활이 지대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한 수기중 일부입니다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정당성 여부와는 관련이 없는 글이므로 정치적 또는 역사적 해석은 삼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료출처 : 516과 해병대 / 청룡회

<중략>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준장은 부관이 시간에 맞춰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밤11시였다.
인사참모 최용관소령, 통신참모 문성태중령이 기다리고 있다가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단내 미군고문단도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최소령은 전차중대의 출동문제를 제기했다.
원래 출동계획에는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면 그 굉음으로 한강다리를 넘기전에 폭로될 위험이 있다고해서 제외되어 있었다.
최소령은 주력부대가 서울시내로 들어가는 시간에 맞추어 전차중대가 출발하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자정을 넘어서 5월16일로 넘어간 뒤 드디어 오정근대대장이 전화로 보고해 왔다.
"지금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지휘반은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게 되어 있었다.
<중략>
김윤근여단장은 지프를 타고 전차중대로 향했다.
이미 주력부대의 트럭종대가 엔진소리를 우르렁거리면서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중대본부에 도착한 김윤근준장은 정문보초에게 "지금 중대장을 보러가니 전화로 깨우라"고 명령했다.
중대장막사에 들어가니 김현호대위가 옷을 입고 있었다.

김윤근준장은 그에게 또 거사 취지를 설명해주었다.
"여단장님이 나가신다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오전 4시에 출발할 수 있소?".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출발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좋소. 오전 4시에 서울로 출발하시오.".


김윤근준장의 후미에 붙은 60여대의 트럭종대는 대대병력을 태우고 김포가도를 달렸다.
달은 없었지만 별빛이 영롱한 밤이었다.

해병대가 염창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가에 박정희장군과 일행이 서있는 모습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들어왔다. 김윤근여단장은 급히 차를 세우고 내렸다.
철모를 쓴 김장군은 박정희장군에게 뛰어오더니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보고했다.

"해병대 이상없이 출동했습니다."
"수고 많았소.".

박정희장군은 김장군의 손을 잡은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장군, 30사단에서 거사계획이 탄로가 났소.
그래서 30사단, 33 사단, 공수단 다 나올 수 없게 되었소.
이제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 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으니 김장군만 믿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는 수 없지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해 봅시다.".
김윤근여단장은 담담하게 말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중략>

박정희장군와 장교들은 염창교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해병대차량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지축을 울리면서 출동하는 해병대는 박정희장군에게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적이었다.
한때 "부대가 나와야 산속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이라도 하다가 협상이라도 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박정희장군은 이젠 성공의 확신까지 가질수 있게 된 것이다.

염창교에는 6관구사령부에 모였던 육군장교들 10여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정희장군과 해병대를 만났다.
박정희장군은 이들 장교에게 "이제는 부평33사단으로 가서 출동을 독려하라"고 명령했다.
단호하고 자신감이 붙은 말투였다.
박정희장군차는 해병대를 뒤에서 따라갔다.

해병대뒤에는 출동이 늦었던 공수단트럭이 따라붙었다.
이로써 해병대는 선두부대가 되었다.
이는 김윤근준장이 피하고자 했던 상황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해병대는 육군으로부터 당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해병대와 공수단은 새벽 3시30분경 한강 인도교의 남단인 노량진쪽에 도착했다.
남한강파출소의 경찰관들이 무슨 일인가하고 나오는데 해병대병사들이 공포를 쐈다.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해병여단의 선두인 제2중대가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을때 트럭 두대를 여덟 팔자로 배치한 헌병들의 제지를 받는다.
중대장 이준섭대위는 참모총장도 이번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헌병들이 총장의 명령을 받아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줄 알고 헌병중대장 김석률대위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런데 김대위는 "우리는 총장님의 명령에 따라 어떤 부대의 통과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이 보고를 전해들은 오정근대대장은 김윤근여단장에게 뛰어갔다.
오중령도 참모총장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따지듯 말했다.


김윤근준장은 박정희소장한테 들은대로 설명해준 뒤 "해병대만 가지고 혁명을 강행하기로 했으니 헌병이 계속해서 막으면 밀어버리시오" 라고 명령했다.
오정근중령은 "알았습니다. 밀어버리겠습니다"하고 시원하게 복창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오정근중령은 원래부터 해병대 단독거사를 꾀했던 이였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주저할 이유가 적었다.
그뒤 앞쪽에서 총성이 들려왔고 곧 조용해지더니 오정근중령이 무전기로 보고했다.
"헌병을 쫓아버리고 지금 저지선을 통과해서 인도교로 들어갑니다.".


한강인도교 남단에 설치한 트럭 바리케이드를 넘는 총격전에서 헌병 3명, 이준섭대위 등 해병 6명이 부상했다.
해병대 후미쪽에 붙어있던 김윤근여단장이 탄 지프도 인도교로 들어갔다.
바리케이드로 놓아둔 트럭은 엔진이 꺼져 있어 치우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김윤근여단장은 지프에서 내렸다.
중지도쪽에서 또 총성이 들렸다.
오정근중령이 달려왔다.


"중지도에 제2저지선이 있고 헌병이 저항합니다.
혹시 이 다리에 폭파장치를 해두었을지 모르니 병력을 일단 노량진쪽으로 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폭파장치가 그리 쉽게 되겠소. 걱정 말고 밀어붙이시오. 그런데 저 저지선의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에 거슬려요. 저것부터 깨부숴버려요.".
오정근중령은 중지도지점에 설치된 제2 저지선의 헤드라이트를 겨냥해서 일제사격을 하게 했다.
불빛이 꺼지자 제2저지선도 돌파되었다.

김윤근준장은 한강 인도교의 반을 지나 이제는 용산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서서히 움직이던 해병대 차량종대는 다시 정지했다.
오정근중령이 다시 달려왔다.


"큰일입니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큰일은 무슨 큰일이오. 저지선이 있으면 돌파해버려야지."
그러나 김윤근준장도 앞으로 저지선을 몇개나 더 돌파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중략>
그러다가 트럭을 탄 장병들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아무것도 모르고 출동한 장병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때 박정희소장도 차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있었다.
박정희일행은 중지도, 즉 한강다리의 중간지점을 지나 북쪽으로 걸어갔다. 북단에는 제3의 저지선이 있었다.
트럭 4대를 동원하여 차단벽을 만든 것이다.
트럭들 좌우측에서 헌병들이 매복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해병들은 상체를 숙이고 뛰어가 저지선 앞에서 엎드려 응사하고 있었다.
헌병들의 병력이 얼마인지를 알 수가 없었으니 불안감은 더했다.<중략>

김윤근준장이 박정희소장에게 뛰어왔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지선이 몇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목표 점령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대로 밀어버리시오.".
박정희소장의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에 김윤근준장도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박정희소장은 해병대가 작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물었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