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육군특무대 난입사건 -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中

by 관리자 posted Apr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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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육군특무대 난입사건(54년 4월)

 


중순경 어느날 전등사(傳燈事)에서 베풀어지고 있던 강화지구 육군특무대장(김 모소령)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해병 강화부대(2연대 산하 독립14중대)장 석태진(石泰鎭)대위는 HID와 켈로부대를 비롯한 상당수의 기관장들이 초청이 된 그 파티 석상에서 그의 비위를 거스리게 한 특무대장 김 소령과 약간의 말다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발단이 되어 소속부대(14중대)의 당직사관과 소대장 등이 특무대와 특무대장의 집에 난입(亂入)하여 난동(亂動)을 부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그 파티 석상에서 특무대장 김 소령이 육사 9기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해병대 장교들(해간1기)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내가 그 사람들과 동기생이니 이제부터 자네라고 부르겠네하고 아랫사람 취급을 하자 그 말에 비위가 거슬렸던 석태진 대위가 위수사령관이 누군데…하는 생각을하며 김소령!하고 말문을 연 것이 발단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말다툼이 벌어졌던 것인데, 문제는 기분이 언짢아 파티장 밖으로 나온 석태진 대위를
따라 나온 3~4명의 특무대 대원들(문관)이 석 대위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목격한 석 대위의 운전병이 부대로 돌아온 후 당직사관에게 보고를 함으로써 평소 특무대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당직사관 김중위(통역장교)가 소대장들을 불러 모아 특무대장의 사과를 받을 대책을 논의한 끝에 먼저 강화경찰서에 있는 대외통신용 교환대를 점거하여 정보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조치한 다음 지프차를 타고 특무대를 습격했는데, 그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즉 특무대 청사로 난입하여 특무대장을 나오라고 소리치자 겁에 질린 대장은 월장을 했고, 월장을 한 그는 그 담장 밑에서 불쑥 권총을 들이대며 손을 들라고 한 해병대 장교에게 일격을 가하고 달아나고 말았는데, 일이 그렇게 되자 일부 장교들은 그 길로 텅 비어있는 특무대장 집으로 가서 방안에 있는 외제 생활용품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것으로 감정풀이를 했고, 특무대에서 특무대장 보좌관을 꿇어 앉혀 놓고 있던 일부 장교들은 그 보좌관을 부대본부로 연행하여 부대장(석태진 대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특무대장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리고 상황의 종료로 강화경찰서의 대외통신용 교환대의 기능이 회복되었을 때 서해지구에 대한 첩보활동을 관장하고 있던 미공군의 니코라이 대위는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상부에 보고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육군부대와 충돌을 했던 그 강화부대 장교들의 난동사건은 휴전 후의 군부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손원일(孫元一) 국방장관이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여 각 군 간의 충돌사건이 발생할 시에는 엄중하게 지휘책임을 묻겠다고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의 육군특무대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김창룡(金昌龍) 장군이었는데, 육군특무부대에서 그러한 변을 당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 사건은 헌병총사령부의 조사가 끝난 후 금촌(金村)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제1여단 본부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에서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매듭을 지었는데, 그 결과는 주동자로 지목된 당직사관 김 모 중위는 파면처분을 받았고, 소대장 3명은 근신처분, 강화부대장 석태진 대위는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이 그 당시 국방부에 파견되어 있던 김동하(金東河) 준장에게 석태진 대위를 빨갱이라고 말하면서 파면을 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3개월 간의 정직처분을 받았다.

그가 그러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운전병 강 모 일병과 난동을 부린 장교들이 헌총 조사관(김상근 대위)으로부터 진술을 받을 때 부대장 모르게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난동사건은 다음과 같은 훗일담을 남기고 있다.즉 석 대위가 그러한 처벌을 받게 되자 여단본부 인사참모 함덕창(咸悳昌) 소령은 석 대위를 위로하면서 정직처분을 받게 되면 급료의 3분의 2를 몰수하게 돼 있었는데도 전액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을 뿐 아니라 서울로 가서 쉬고 올 수 있도록 파커 다섯벌과 매월 쌀 한가마니씩을 지급해 주었고, 3개월 간의 정직기간이 끝난 후에는 그의 동기생들(해간 3기)은 소총중대의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러한 시기에 4.2인치 중박격포중대장으로 발령을 받는 등 파격적인 배려를 입었다.

그리고 그가 일선근무를 마치고 해병교육단의 상륙전 초등군사반에 입교했을 때는 그의 명성을 전해듣고 있던 교수부의 모 채점관이 "죄송합니다만, 이름만 써 놓으시면 알아서 채점을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우와는 달리 그는, 결국 그 정직처분으로 진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61년 군사정변이 일어난 직후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을 했다.
고희를 넘어선 나이에 필자의 취재에 응해 준 왕년의 강화부대장(독립14중대장) 석태진씨는 그 일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부덕(不德)했던 자신의 탓으로 부하장교들에게 그러한 누를 끼치게 된 것을 늘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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