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期 맞는 대한민국 해병 그들만의 세계 # 02

by 임영식 posted Oct 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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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과 극복의 역사










‘해병 1기’ 수료 기념
사진(1949), 청룡부대 파월 환송 장면(1965), 베트남전에 참전한 어느 해병





 

이쯤에서 해병대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해병대 창설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작전에서 단시간에 적진으로 침투할 수 있는 상륙작전부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신현준
당시 해군 중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한 건의가 계기가 됐다. 신 중령은 초대 사령관, 김성은 당시 해군 중령(이후 제4대 해병대사령관,
제15대 국방부장관 역임)은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 시작은 초라했다. 1949년 4월15일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 격납고에서 해군 가운데 선발한 380명(이중 병은 가입대한 해군
신병 13기 중 지원한 300명으로, 이들이 곧 ‘해병 1기’다)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 옛 일본군의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전투복도 없어 질 낮은 국산 광목을 국방색으로 염색해 훈련복으로 썼다. 훈련방식도 일본 해군과 육전대식,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다. 게다가 강병(强兵) 양성 명목의 살인적인 단체기합과 무지막지한 ‘빠따’가 일상화돼 있었다.

이렇게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출발했음에도 창설 때부터 엄격한 군율과 위계질서를 유지한 해병대는 6·25전쟁에서 ‘귀신 잡는 해병’으로
불리게 된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지구 전투를 비롯,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한 진동리지구 전투, 인천상륙작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해
서울 수복의 상징이 된 서울탈환작전,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승리를 거둬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받은 도솔산지구 전투, 적의
최정예 부대를 격퇴시켜 아군의 중동부 전선 통제권 장악에 기여한 김일성·모택동 고지 전투,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한 장단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해병대 정신을 입증했다.

해병대는 또 1965년 10월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 원정군인 청룡부대를 파월(派越), 1972년 2월 귀국 때까지 줄곧 전장의 최선봉에
섰다. 청룡부대는 베트남 최대 항구인 캄란에 상륙한 이후 캄란지구에서 투이호아, 추라이 및 호이안지구로 북상 전진하며, 파병 6년4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 작전 15만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화기 노획 4282정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파월병력 3만7304명 중 1076명이 전사했고, 2702명이 부상해 손실률은 10%에 이르렀다.

해병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가장 험난한 전투를 치러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전투현장에서 이룬 업적은 빛나는 전통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독특한 그들만의 정신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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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양수근 해병대
교육훈련단장


“해병대 오려면 결석 말고 단증(段證) 따라”





 

해병대 교육훈련단(이하 교육단)은 해마다 24개 기수의 신병 1만여
명을 배출한다. 병뿐만 아니라 사관후보생, 부사관후보생 양성교육도 실시한다. 여기에 실무(기간)병력의 보수교육도 맡고 있다. 2004년에는
양성·보수 교육과정을 합해 1만5000여 명이 교육단을 거쳤다. 현 교육단장은 양수근(梁秀根·52·해사32기) 준장. 1992년과 1997년
교육단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지난해 12월 말부터 교육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1000기 신병 배출을 앞둔
소감은.
“교육단장으로서 1000기를 맞는 감회가 깊다. 베트남전 철수 이후인 1973년부터 매월 2개 기수씩 배출했는데, 세월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온 것 같다.”
-아무래도 신세대 해병은 예전의 선임병들과 차별성을 띨 텐데….
“우선 식성부터 다르다. 김치와 생선을
싫어한다. 그래도 3∼4주쯤 버티다 고된 ‘극기주’ 훈련 때는 권하지 않아도 다 먹더라.
또 신세대 훈련병은 개인주의 성향이 짙다.
그래서 솔선수범하며 동기들과 더불어 단결심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에서 NQ(Network Quotient·공존지수)를 강조하고
있다.”
-교육훈련과정에서 훈련병이 부상 또는 사망하는 경우는 없나.
“지난해 내가 단장으로 오기 전 2명의 훈련병이 사망했다고
들었다. 주로 교육 4∼5주차 때의 행군이나 구보시 훈련병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사고를 최소화하는 게 교육단의 책무다.”
-해병대
신병 모집에 조기 합격하는 비결을 귀띔한다면.
“불합격의 주원인은 고교 재학시의 결석 때문이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출결사항과 봉사활동 등
성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본다. 무술 유단증이 있으면 유리하다. 체력이 달려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건 입소 후
향상된다. 한 가지 숨은 비결이라면 지원율이 비교적 낮은 혹서·혹한기를 택하라는 것이다.”
-교육단 시설 면에서 개선할 점은
없나.
“훈련교장이 협소해 대개 제1사단의 것을 공동으로 쓴다. 양성과정 전용 훈련교장이
필요하다.”

 1987년 사령부 재창설

하지만 해병대에도 시련은 있었다. 창설 24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 ‘경제적 군의 관리 운영’이란 명목으로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부대, 행정·군수지원 부대가 해군에 통폐합돼 각종 법률 등에 의해 임무와 권한이 상실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전투에선 한껏 명성을
떨쳤지만, ‘정치’엔 능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되던 해병대는 전력관리상 문제점이 노출돼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의 개선이 필요해짐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기구인 해병대사령부를 1987년 11월 재창설한다. 또 1990년 8월 국군조직법에 해병대 관련사항을 재입법화함으로써 부대령 부대와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다. 그후 국방부의 재경(在京)부대 교외이전 계획에
따라 1994년 4월 해병대사령부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일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과 백령도·연평도 등 전략도서 방어를 주임무로 하면서 유사시 적의 옆구리와 후방을 강타하는 상륙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해병대는 사령부 아래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2개 사단(포항 제1사단, 김포 제2사단)과 1개 여단(백령도 제6여단), 연평도 방어를
맡은 연평부대, 교육훈련단, 상륙군지원단이 그것이다.

해병대의 주요 전력 중 기동장비는 K-1 등 2종의 전차 100여 대, KAAV (Korean Assult Amphibious
Vehicle) 등 3종의 상륙돌격장갑차 160여 대, K-200 계열의 장갑차 80여 대를 비롯해 모두 59종 3400여 대다.
상륙돌격장갑차를 제외하면 육군 지상장비와 거의 같다. 화력 면에선 K-9 등 4종의 자주포 200여 문과 4.2인치 등 3종의 박격포 700여
문을 갖췄다. 개인화기도 육군과 비슷한데, 다만 분대 및 소대급 기본화력이 육군보다 좀더 강화된 특징을 지닌다.

명인·기인 열전

역사가 오랜 만큼, 해병대를 거쳐간 인물도 많다. 우선 정계에선 현역 의원으로 한나라당 김기춘·공성진·박혁규·정병국 의원과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이 있다. 전직 의원인 홍사덕·정창화씨도 해병대 출신.

관계 인사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과 이희일 전 동자부 장관, 작고한 홍성철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조계에도 30여 명의 법조인으로 이뤄진 ‘해병대 법조회’가 있다.

재계에선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김무일 현대INI스틸 대표이사 겸 부회장, 김동렬 아세아시멘트 사장이 해병대 출신이다.

언론계에선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연합통신 사장을 지낸 현소환 ‘뉴스앤뉴스’ 대표,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씨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문학계 인사로 소설가 황석영씨(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있는 소설가 현기영씨,
소설가이자 인하대 교수(국문학)인 김용성씨가 있다.

연예인으로는 탤런트 임채무·김상중, 가수 김흥국·남진, 개그맨 임혁필씨가 해병대 출신이다. 배우 장동건을 해병으로 내세운 영화 ‘해안선’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도 해병 부사관 출신이다.

창설기와 6·25전쟁기, 베트남전쟁기의 인물 중에도 독특한 개성과 해병정신을 보인 이들이 수두룩하다. 해병대 기합의 대명사로 불린 강복구
전 해병대전우회 총재, 일본 관동군 총검술 교관 출신의 강용 대령, ‘삼국지’의 영웅을 동경해 자신이 사살한 공비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상관에게 내보인 진두태 중위 같은 창설기의 ‘괴짜’들을 비롯해 군기 확립을 위해 가짜 총살형을 집행한 중대장,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은
죄책감에 자결한 소대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20여 년의 해병대 정훈장교 복무경험을 바탕으로 ‘해병대의 명인·기인전’(전2권) 등 해병대 관련 저서만 10여 권을 펴낸 정채호(79)
예비역 중령은 “해병대 56년 역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해병대를 일궈낸 명인(名人)들과 개성이 뚜렷하고 갖은 기행(奇行)을
보여준 기인(奇人)들은 물론, 이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모든 해병이 함께 이룩한 것”이라 말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1950년대 명문여대생 등 70여 명의 부녀자와 엽색행각을 벌인 ‘희대의 카사노바’로, 재판과정에서
‘법은 정숙하고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 보호한다’는 유명한 판결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간에 각인시켰던 박인수씨도 해병대 대위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파면돼 결국 불명예 제대함으로써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의
대열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병대전우회(총재 김명환 예비역 중장)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이 해병대의 존재 이유이며, 이를
위해선 모든 면에서 특출해야 한다는 ‘최고 정신’은 종종 해병대 출신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크고 작은 소동으로 이어져 ‘개병대’ ‘패거리
문화’란 오명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요란스러움은 한편으로 군문(軍門)을 떠나서도 해병대 사령부를 ‘모군(母軍) 해병대’라 부르며 70이
넘은 할아버지도 얼룩무늬 위장복에 빨간 모자를 쓰게 만드는 특유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전우회를 태동시켰다.

전우회의 효시는 1970년 예비역 해병·해군 원로들이 결성한 ‘서해구락부.’ 그러나 서해구락부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됐다. 그후
1988년에 해병대전우회가 공식 출범했다.

해병대 예비역 수는 80여 만명. 이중 병 출신 예비역은 61만여 명에 이른다. 전우회에는 중앙회를 중심으로 전국 16개 광역시·도
연합회와 235개 시·군·구 지회가 조직돼 있다. 해외 전우회도 17개국에 56개 지회(미국 35개)가 있다.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로 쓰는
분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우회의 활동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초질서 확립을 위한 교통정리, 방범순찰, 청소년 선도, 불우이웃돕기, 수중환경보호,
인명구조활동, 각종 재난구조 자원봉사 같은 일련의 봉사활동이다. 올해 1월엔 전우회 사상 최초의 해외자원봉사활동으로 쓰나미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지역에 11명의 자원봉사단을 파견, 10일간 방역활동과 방역마스크 배분 활동을 했다.

해병대전우회중앙회 강신길(60·해사23기) 사무총장은 “현 총재가 취임하기 전까지 전우회는 최근 몇 년간 과거 총재 선거를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두 파로 갈라져 혼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직을 재정비하는 중이다. 80만 예비역이라곤 하지만 실제 회원 수는 공개하기
곤란하다”면서도 “전우회 운영은 회비를 걷지 않는 대신 전액 예비역 해병의 자발적인 기여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우회의 숙원사업은
해병대전우회관 건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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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명환 해병대전우회
총재


“‘주먹철학’으로 위민(爲民)활동 펴나갈 것”





 

해병대전우회는 80만 예비역 해병의 구심체 노릇을 하는 조직.
2004년 11월16일 임기 2년의 전우회 총재로 취임한 김명환(金明煥·59·해사22기) 예비역 중장은 1999년 10월부터 2년간 제24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고,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각군 예비역 장성과 함께 현역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전술·정보 등 국방
제(諸) 분야에 대한 연구·분석 활동을 하고 있다.
-전우회의 주된 임무인 대민봉사활동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갈 생각인가.
“‘국민의
봉사대’를 표방한 만큼, 생활현장의 힘든 곳에 항상 전우회가 함께할 것이다. 해병대는 ‘애민(愛民)정신’에 기반을 둔 위민(爲民) 군대다.
대다수 해병이 현역 복무시 부대 인근 주민과 돈독한 유대를 갖고 지내며 그들을 돕는다.
그러한 위민정신에 부합하는 봉사활동을 전개하자는
생각에서 얼마 전 해병대 창설일인 4월15일을 ‘일오(一五)봉사의 날’로 정했다. 이는 매월 15일 각 지역 특성에 맞는 봉사활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일오봉사활동’이 전우회뿐 아니라 각급 학교와 지역단체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으면 한다.”
-사령관으로 있던 2001년에 해병대
최초로 여군 장교를 탄생시켰는데, 그 배경은?
“6·25전쟁 당시 해병대에 126명의 여군이 있었지만, 이후 맥이 끊겼다. 육·해·공군
모두 여군 장교가 있는데 해병대만 그렇지 못해 2001년에 여군 장교를 양성했다. 당시 경쟁률이 23대 1이나 돼 수준 높은 인재들을 선발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소위로 임관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른바 ‘주먹철학’을 강조한다던데….
“손가락 한
개씩은 연약하나 그것을 뭉쳐 주먹을 쥘 땐 그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전우회로 치면, 엄지는 중앙회, 검지는 연합회, 중지는
지회인데, 해외전우회와 직능단체 전우회까지 한마음으로 뭉쳐 국민의 신뢰와 사랑 속에서 성장하자는 의미다.”
-사령관 출신으로서 기대하는
해병대의 발전방향은.
“깨끗한 조직, 정직한 구성원이 됐으면 한다. 깨끗하지 못한 조직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또 경쟁력 있는
해병대가 돼야 한다. 다목적이며, 신속 대응 능력을 갖춘 공지기동해병대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한미 해병대 연합작전 수행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전우회의 ‘모군(母軍) 사랑’

전우회와 별도로, 현역 해병대도 민·군간 유대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해병대 캠프’ 운영이 대표적이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 차례씩
개최하는 해병대 캠프는 민간인이 해병 부대에서 소정의 훈련과정을 거치며 극기체험을 할 수 있는 4박5일 프로그램. 해병대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를
받으며, 유료로 운영된다. 고된 과정인데도 사서 고생하려는 사람들이 중·고생부터 가족 단위 지원자까지 줄을 잇는다. 이들은 해병대 제1사단에서
부대 견학 및 내무생활, KAAV 탑승훈련, IBS(상륙용 고무보트) 기초훈련을 받는다.

해병대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못하는 해외전우회 회원들은 자녀를 이 캠프에 보낸다. 3∼5대 1에 이르는 경쟁률을 쉽게 뚫기 위해 우선
선발될 수 있도록 캠프에 입소해야 하는 이유를 절절이 적어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97년 사회공익 교육사업으로 시작된 해병대 캠프가
2004년까지 배출한 교육생은 무려 2만800여 명이나 된다.




‘잡종강세’의 ‘강소군(强小軍)’

해병대는 지난 5월2일 김명균(해사27기) 중장을 신임 사령관(제27대)으로 맞았다. 해병대가 추구하는 ‘미래 해병대’는 어떤 모습일까.

해병대사령부 관계자는 “해병대는 궁극적으로 ‘비전(vision) 2025’에 의거해 분쟁의 성격과 강도에 따라 편조 개념으로 적절한 부대를
편성, 운용하는 다목적 신속대응군 임무를 수행하는 공지(空地)기동부대를 지향한다”며 “따라서 해병대 부대 구조는 현재 2만7000여 명인 병력을
장기적으로 감축하고 항공단과 군수지원단까지 두루 갖춘 해병공지기동부대(MAGTF)로 개편할 방침”이라 밝혔다. 공지기동부대란 해병대 독자적으로
지(地)·해(海)·공(空) 3차원의 전력을 구비해 전투상황에 따라 적시에 적절하게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부대를 의미한다.

역사가 가장 오랜 영국 해병대의 마스코트는 불독, 미국 해병대의 그것은 투견의 대명사격인 핏불테리어다. 한국 해병대의 마스코트는 진돗개.
하지만 이젠 더욱 어울리는 상징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해병대는 창설 당시 구령이나 도수훈련은 해군의 그것을, 전술훈련은 육군의 것을 차용했다. 그런데도 이후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해
‘상승불패’ 전통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신화’가 됐다. 이런 해병대를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잡종강세(雜種强勢)’를 띠고 태어난
‘라이거(liger)’에 비유한다면 과장일까. 라이거는 번식능력이 없어 1대(代)에 그친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병대는 끊임없이 수혈되는 ‘청춘의
끓는 피’로 1000대를 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