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한군부 북응징위해 해병대 망치부대 육성

by 관리자 posted May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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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발굴취재 문일석기쟈>  대북응징-보복 특수부대 해병대 망치부대

 

북한이 군사적으로 남한에 침투, 침략행위를 했을 때 이를 응징하는 차원에서 구성됐던 해병대 망치부대가 최근에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1980년대 초 300여명으로 구성된 해병 망치부대(해병 812요원) 출신들은 “북파 특수훈련 기간 중 완벽한 임무완수 후 생환을 위하여 인간 이하의 한계 훈련을 실시했고 후일 후유증으로 인한 자살충동과 정신적인 충격에 많은 요원들이 순직하거나 사망을 하였다”면서 “국가유공자위 예우를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당시 군부는 혹독하게 훈련시킨 북파부대 요원을 양성한 것. 해병대 망치부대 요원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받았던 노영길(51세. 군복무기간 1981.11-1984.5)은 망치부대의 훈련체험을 담은 “해병 812요원(해병 망치부대)”라는 책을 곧 출간, 망치부대가 어떤 부대였는지를 상세하게 세상에 알리게 됐다. 해병대 망치부대가 어떤 부대였는지를 추적해본다.
 
망치부대는 어떠한 남북정치 상황에서 탄생한 부대였을까? 해병대 망치부대 출신들은 당시 망치부대가 결성된 남북의 정치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망치부대 운용시점 남북상황

 

 

 

 


 

 
 

 

해병대 망치부대원들은 “1982년도부터 1984년까지 백령도와 연평도에 북한 테러에 대한 응징을 위해 극비리에 존재 했던 대북응징보복을 목적으로 세워진 특수부대가 있었다. 이 작전계획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고도로 훈련된 해병 특수요원들이 고무보트를 이용해서 북한의 군사주요 시설 폭파, 요인암살, 납치, 교란, 기만, 초토화하고 해상으로 2시간 안에 상황을 종료하는 방법과 북한 경비정의 추적을 뿌리치거나 포격을 피하여 북한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또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작전이 있었다”면서 “문서는 극소수의 관계자만 보았으며 보는 즉시 파기하라는 극비문서였다”고 설명했다.

망치부대원들은 “남북 관계의 복잡한 정치적 환경과 북한의 의도적인 대남무력 도발 기도와 의지를 사전에 봉쇄하고 도발 시 보복작전을 위한 전술적인 대응작전 개념으로 탄생했다. 부대 규모는 25명의 소규모로 2개를 특수(대북응징보복)부대로 편성하여 맹훈련을 시켜 실전에 즉각 옮길 수 있는 최고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기습작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사전 선정된 북한 내 목표지역에 침투 응징보복하기위해 NLL를 선상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고 증언한다.

이어 “1980년대 정치적 혼란기(광주의거)를 틈타 횡간도 무장간첩 남파 사건을 시작으로 DMZ 내의 총격사건과 오늘 날과 같은 빈번한 NLL침해 행위와, 1981년 서해 상공에서 미정찰기 SR71 블랙버드 격추 미수사건이 있었다. 특히 북한은 북괴군 지휘관의 모험주의를 살리기 위하여 1977~ 1995년(18년간)까지 북한의 조명록(공군참모총장 및 6.15공동성명시 김정일 오찬사를 대독한 총정치국장)주도하에 1981년 8월12일 미그기 편대(6대)를 노골적으로 2차례에 걸쳐 백령도 상공에 침공시켜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정도의 저공비행을 자행함으로서, 해병대는 물론 한국군 전체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기를 저하 시켰고 서해5도를 작전 통제하는 유엔사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전체의 안보가 속수무책으로 크게 유린당한 상태라 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해병대는 울분을 참지 못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으며 적의 도발에 대하여 실질적인 대응태세가 절실히 요구된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극도로 고조된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강력한 대북경고 메시지로 각 군부대에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거 '대북응징보복'태세를 천명 하였으며. 적의 도발 억지 수단으로 특별히 특정부대를 지정하여 해병대와  육군(공수특전단)에 명시한 작전 임무를 부여하고. 1981년 후반기에 계획되어 육군 “벌초” 해병대 “망치” 작전이란 명칭이 부여되어 대통령지시 특 비밀로 지시된바 있다“고 덧붙였다.
 
망치부대 주요 훈련내용
 
망치부대의 훈련은 혹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훈련내용을 종합정리,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1차 훈련은 1982년 1월부터 혹한기 동계해상훈련을 시작하여 1984년 10월 30일까지 7차례에 걸쳐 300여명의 북파특수 요원들을 양성(특수수색대장) 시켰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백령도와 연평도 각 25명 소대 규모의 소부대를 실제 작전을 위하여 은밀 진입 후 실전에 투입 훈련과 병행하여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812계획의 망치작전에 참여하는 요원 선발은 우선적으로 특수교육(특수수색교육, 공수, 저격수, 무술유단자)을 이수한 요원을 선발했다. 엄격한 보안 유지 하에 신원조회를 실시한 후 선발했다. 전투 공황증 예방을 위하여 사단 계획 수립시(임무 분석) 전지훈련 이란 점을 불가피하게 사용함을 강조했다.

 

 
 

 

 
 

 

당시 해병특수수색대 중대는 해병 제 1 사단 직할로(해병7123부대)서 국내외에서 각종실전 전투 경험과 전군의 다양한 특수훈련을 이수한 우수요원으로서 고도의 발전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 부대였으나 상부의 명에 의하여 교육훈련을 전면 중단하고 다양한 경륜과 경험을 한 특수훈련 이수자(UDU, UDT, MIU, 고공침투 등) 중심으로 교관단을 편성했다. 해병대 전 부대에서 활용 가능한 자원을 총 망라 망치부대를 편성 임무완수를 위한 북파특수훈련에 심혈을 기울여 계획된 훈련을 실전과 같이 집행했다. 이 작전에 소요 되었던 북한 장비 물품은 AK47소총을 비롯하여 TT권총 독침 공작교재 복장 크리스탈 송수신기 기타 등은 정보부대에서 지원 받았다. 적 R/D 탐지를 피하기 위하여 반 R/D커버 수 10점을 최초로 창원 모 방위산업 업체에서 시험 제작 한 것을 직접 구매하여 무장시켰다.

목표 지역의 상세한 특수정보 해안정보 항공사진(SR71 블랙버드기 촬영추정)과 적성장비 등은 특별작전지시(2급비밀로 분류)에 의거 해병 1사단 특수수색대에서 사단을 경유하여 해군본부에 요청하여 본 작전에 필요한 상세한 정보를 수시로 확보 하였고 임무지역의 상세하고 정밀한 작전계획이 수립되어 반복적인 표적에 대한 숙지훈련을 실시했다.

중요 정신교육의 기본지침은 적개심고취, 영웅심, 복종심, 담력배양, 언어(사투리)상 해병대 특유의 IBS 야간 기습훈련에 중점을 두고 북한 언어(사투리)사용의 생활화 했다. 그리고 생환 시 처우 등을 주로 주입식 실전 훈련을 시켰다. 망치부대의 일반 및 특수공작 훈련을 위하여 동해안 지역에서 북한 간첩 들이 침투한 루터와 독자적인 루터를 개척하여 임무위주의 맞춤형 교육으로 북한의 표적 지역과 유사한 지형을 선정 1~3월까지 주로 야간에 10km~30km 지점까지 영하와 황천의 날씨에도 IBS에 반 R/D 카버와 실버콤퍼스를 장착하고 엔진 또는 패달링으로 접근 실제 해안방 어 배치된 R/D기지 국가보안 목표 해안초소 등을 표적으로 반복 기습훈련을 숙달 시켰다.

육군지역인 경북 영일군 죽장면 상옥리 1200고지 일대에서 북한의 장산곶과 옹진반도 지역 일대의 내륙 지휘소가 위치한 유사한 지형을 선 정 후 가시설을 설치하여 목표까지 접근훈련 실제기동사격, 시설습격, 생존 훈련, 도피 및 탈출, 폭파, 비트구축, 요인암살, 포획 등 다양한 훈련을 실시했다.

망치작전 요원의 훈련 교육대장(특수수색대대장 ) 외 1명이 백령도와 연평도를 직접 방문하여 현지를 정찰하고 침투지점 선정과 회수지점(철수지점) 등 정밀한 해안 정보를 현지 수집 했다. 훈련 상황에 대한 보안을 위하여(숙영지 훈련 장소 선정 실제 작전을 위한 표적지 역의 모의교장 설치 등) 대부분 행정적인 사항만 해병 6여단장과 연평 부대장에게 보고 하였고 훈련을 독자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북파특수훈련 기간 중 완벽한 임무완수 후 생환을 위하여 인간 이하의 한계 훈련을 실시하였고 후일 후유증으로 인한 자살충돌 과 정신적인 충격에 많은 요원들이 순직하거나 사망을 했다.
 
망치부대 한 장교의 증언
 
망치부대 요원들은 1981년과 1982년 초 두 번에 걸쳐 북파특수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 교육에 참가했던 한 장교가 쓴 수기가 당시의 교육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그 장교는 2차 북파특수교육(1982년 1월5일부터 3월 6일까지 9주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밀봉교육을 마친지 채 3개월이 안되어서 해병대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동절기 망치교육에 소집되었다. 이 교육도 1차 보수교육(밀봉교육)을 이수한 장병들을 중심으로 차출 되었던 것이다. 이 교육은 특정한 목적이 없으면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몇몇 지명된 교육 대상자는 훈련을 못하겠다고 자대로 피신했다가 강제로 끌려와 합류했다. 상부의 특명이 있었다고 했다. 교육생 전원은 교육을 마칠 때까지 외출 외박이 일체 금지되었다.

동절기라 추위는 끔찍했다. 체력 강화훈련이라는 미명 아래 혹독한 교육이 이어졌다. 체력훈련으로 선착순 몇 킬로미터 정도가 아니라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M 16 소총과 페달을 들고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구보하도록 했다.

정신교육은 적 지역에 침투 경험이 있는 첩보부대 소속 요원이 강사로 동원되어 우리를 교육하기도 했다. 해상 침투 시에는 너무 추워서 일반 잠수복이 아닌 드라이 슈트를 착용해야 했으며 속에는 내복을 껴입기도 했다. 꽁꽁 언 손은 오그라들어서 모터 조종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수 공작훈련이었다. 훈련 중에 우리가 침투할 목표로 서해 북단에 위치한 적진의 여러 섬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와 유사한 지역을 특정하여 야간에 해상으로 10~ 30킬로미터까지 해상으로 나간 후 적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도록 R/D 커버를 덮었고, 침투 해안이 멀어서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버 컴퍼스를 장착하고 팀별로 독자적 방향을 유지하면서 실제 해안 방어를 위해 배치된 레이더 기지와 국가 보안시설, 해안초소 등을 목표로 반복적인 기습 침투훈련을 했다. 

나중에는 영일군 육군 지역인 향로봉 1200 고지 일원에 우리가 침투하여 폭파할 기지와 유사한 모형까지 축조되었으며, 실재로 기동사격을 하면서 시설습격 및 폭파, 요인 암살과 납치 등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이수했다. 또한 임무 완수 후 복귀를 위한 생존훈련, 도피와 탈출 요령도 반복해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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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는 중에, 특수임무를 완수하고 생존해서 무사히 복귀하면 특수훈련 교리가 발전한다는 교육도 받았다.

1차 보수교육(밀봉교육) 당시가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육안 침투훈련 방식이었다면, 2차 보수교육(망치교육) 시에는 최첨단 장비가 동원된 과학적  훈련이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적 지역에서 우리 무기인 M 16실탄이 소진될 경우를 대비하여 적의 무기를 탈취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적성 무기인 아카보 소총까지 동원되어 분해, 조립훈련을 반복적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의 훈련을 위해서 동원된 장비들로는 코만도 5( C- 5) IBS 보트에 45마력 엔진을 부착해서 사용했다. 최첨단 야간 투시경, 그리고 저격용 장비로는 석궁( 화살에 맹독을 묻혀 사용) 외에 3가지의 무성무기(검, 표창 등으로 3~ 4미터 거리에서 적을 암살하는 무기), 투투 총(소음 총으로 외형은 M 16과 유사하지만 노리쇠가 작고, 기존 탄창에 투투 탄이 들어가도록 개조되었으며 총구에는 회색 소음기를 부착해서 저격 시 저격 사실을 저격수만 느낄 수 있도록 변형된 무성무기)이 있었다. 그 외에도 양말 속에 자갈을 절반가량 넣어서 적의 뒤통수를 단방에 내려쳐서 암살하는 기술도 연마했다.”

 
노영길, 훈련체험 책으로 발간 

 
 ▲망치부대원 출신 노영길(사진)은 훈련체험을 담은 “해병 812요원(해병 망치부대)”라는 책을 출간 했다.  ©브레이크뉴스

 

당시 군부는 망치부대는 북파를 명령하진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훈련과정에서 피해자가 생겨났다는 게 당시 부대원들의 증언이다. 자신의 훈련체험을 “해병 812요원(해병 망치부대)”이라는 책으로 출간하게 된 노영길은 망치부대원들에 대해 국가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노영길은 “현행법(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수임무수행자라 함은 위법의 제2조 제1항 제2호에 명시 된 내용으로 1948년 8월 15일부터 2002년 12월 31일 사이에 대통령 령이 정하는 기간 중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규정 되어 있다. 따라서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당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 특별지시에 의거 해병대에서 1981년~1984년까지 '812계획의 망치 작전 요원'들은 국가를 위하여 특별한 희생이 요구되는 활동(북파특수교육을 받고 망치작전에 투입)하여 시대에 부응하고 맞춤형 특수임무수행을 하였음에도 불구, 단지 현행법은 '군 첩보부대 소속'만 특수임무수행자로 규정 하고 있다. 이에 부당함을 당시 해병대내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사실 확인을 받아 국회국방위원 및 전문위원에게 일부 법률 개정안을 협의하여 검토 받고자 한다. 812계획의 망치작전은 대통령 구국의 차원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특별지시에 의거 특정부대에 지정된 대북 보복작전(북파특수작전)의 임무가 명백하며 본 훈련 및 작전을 통하여 망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를 보유함으로서 서해5개 도서에 대한 도발 행위에 큰 억지력을 보유하였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가는 병역의무로 복무하는 장-사병을 강제 차출하여 망치요원으로 구성 해병 편제부대 임무와 다른 명시 임무로 대북응징보복을 목적으로 북파특수훈련을 시켜 서해5도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아군이 보호 할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망치작전에 투입 특수임무를 부여 했다. 그 당시 고도의 맞춤식 북파특수훈련의 결과로 망치작전 도중 단 한 명의 피해나 사고 없이 이루진 작전의 성공은 후세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훈련과 특수임무수행의 결과로 잘못 처리된 순직 사망 장애 휴유증 등은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명예회복과 예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영길은 “812요원들의 특수임무수행자 명예회복이 812요원들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사기 진작과 국가안보 의식의 획기적인 발전 의 계기가 될 것이다. 살아도 살아있지 않았던 그 시절의 고통을 떠올리며 국가의 명령에 따 른 저희들을 국가가 버린다면 저희는 국민으로써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 한다. 그리고 구국의 차원에서 밝혀진 대북응징보복 계획은 국가의 수치가 아닌 국민이 군을 신뢰하는 계가 될 것이며 국가의 충성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 유사시 언제라도 소집되어 작전 할 수 있는 특수임무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 할 것이다. 국가는 이제라도 812요원들에게 공로를 인정하고 국가유공자 예우를 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moonilsu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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